스크린 쿼터 축소 파문으로 충무로가 시끌 벅적하다.‘스크린 쿼터’는 영화법 제26조 ‘국산영화 상영 의무’ 조항을 이르는
말이다. 이 조항은 국장이 연간 상영일수의 5분의 2(1백46일, 예외 조항을 적용하면 1백 26일)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0월14일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돌연“올해 국산 영화 의무 상영일수를 1백6일 선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영화계 전체가 즉각 비상사태에 돌입했다.‘스크린 쿼터 감시단 (단장 정지영 감독)’은 다음날“위법적 월권행위”라고 반발했고
18일에는 영화인협회가 긴급 이사회를 열어 임원 25명의 총사퇴를 결의하고 항의 항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20일에는 ‘한국 영화기획실 모임’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으며, 22일에는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이하 쿼터 사수 비대위)’를 결성했다.
이들은 27일‘영화의 날’ 행사마저 거부한 채 항의?규탄 대회를 가졌다. 이 파장은 29일 청와대 오찬으로 이어져, 이태원
임권택 정일성 이덕화 박광수 등 초대받은 영화인 19명이 스크린 쿼터 옹호 입장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29일 영화인들이 모여 만든 스크린 쿼터 감시단은 7월말에 상반기 활동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1백49개 표본 극장에서 평균 57.1일 동안 한국 영화를 상영한다고 신고해놓고 실제로는 그 절반 정도인 26.6일 정도만 상영했다.
감시단은 10월6일 위반 사례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이를 문화체육부에 스크린 쿼터이행을 촉구하는 공문과 함께 발송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이민섭 장관은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국산 영화의 제작이 부진해 극장들이 스크린 쿼터제를 이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화체육부가 제시한 이유였다.‘쿼터 사수 비대위’는 이에 대해 “이번 결정은 극장측의 로비 끝에 나온 조치이다. 이미 여러 극장주들이 이장관
발표 전부터‘올해 의무 상영일수는 1백6일’이라고 말해온 것이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극장측의 축소론과 영화계의 옹호론은 각기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가. 두 주장이 모두 나름의 설득력을 갖고 있어, 자칫
혼돈에 빠지거나 양론을 절충하는 어설픈 결론을 내리려고 서두르기 십상이다. 두 입장이 내세우는 명분과 숨은 속셈을 잘 살펴봐야만 스크린 쿼터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극장측은 무엇보다 사영할 만한 한국 영화가 드물다고 주장한다.“의무 상영일수를 채우려면 질 낮은 한국 영화라도 틀어야 하고,
그러다보면 실제 수익이 줄어들뿐더러 극장 이미지까지 실추되는 결과를 낳는다.” 극장의 희생을 강요하는‘악법’은 당연히 현실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영화계는“외화 장사에 맛들인 극장측의 입바른 논리”라고 일축한다. 명분과 속셈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극장의 횡포를 성토하면서 지난 여름 서울의 중앙극장이 <쥐라기 공원>을 상영하기 위해, 관객이 제법 들던 한국 영화
<백한번째 프로포즈>를 영화사측의 동의 없이 상영 중단한 것을 사례로 든다.
영화계가 지적하는 극장의 횡포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는 이른바‘오치’문제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인은 ‘오치인 영화 상영
사례금에 해당하는데, 전액을 현금으로만 받는다. 심한 경우 오치를 자주 받으려고 영화를 단기간에 끝내고 자꾸 다른 영화로 바꾸기도 한다“라고
밝혔다. 특히 한국 영화의 경우 이 폐해가 심하다.
영화사측은 또한 극장과의 계약이 매우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중견 영화인 ㅇ씨는 “극장은 영화사로부터 먼저 예치금을 받아둔다.
2천만~5천만원 가량의 예치금은 사전 광고비로 충당된다. 극장은 영화사측에 예치금 몫 이외의 광고를 다시 요구한다. 이 요구는 텔레비전?신문 등
광고할 매체와 공고 형식, 분량, 비용까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명시한다”라고 밝혔다. ㅇ씨에 따르면, 이밖에도 냉난방비?극장 관리비?영화 시사비,
심지어 극장 셔틀버스 운영 비용까지 영화사에 떠넘기는 경우도 있다.
영화사측은 “상영할 영화는 많은데 극장수는 한정돼 있다. 이같은 여건에서 땅 짚고 헤어치려는 극장측이 운영의 어려움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극장의 요구를 거절했다가는 두고두고 고통받을 수도 있다”라고 비판한다. 92년부터 93년 6월말까지, 이화예술?세경?모가드
코리아 등 내로라하는 영화사를 포함해 모두 22개 업체가 문을 닫았는데 도심의 극장이 문을 닫은 곳은 드물지 않느냐는 것이다.
말뿐인 영화진흥, 깊어진 고질병 흥행할 가능성이 큰 외화는 광고도 더 집중적이다.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한국 영화의 처지는
초라하기만 하다. 흥행에 실패한 외화 대용으로 예고도 없이 불쑥 간판을 올려야 하는 경우도 있고, 교호상영제(외화와 국산 영화를 반드시 번갈아
상영해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외화 사이 메우기로 하루 상영되고 마는 영화도 많다.
공연 신고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사망하도록 예정된 영화가 관객의 바른 평가를 받을 리 없다. 한국 영화의 외로운 싸움 뒤에
의당 있었어야 할 정부의 애정은, 그러나 별로 보이지 않았다. 영화 진흥과 관련한 말의 잔치가 성대했으나 정작 제 몫을 한 정책은 없었다. 반면
문교부 문공부 문화부 등 영화를‘다스려온’ 행정부처들은 한국 영화를 왜곡시키는데 크게 기여해 왔다. 영화 평론가 조희문씨는“국민 계도와 정권
홍보 및 선전의 도구로 동원되면서 한국 영화는 영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라고 비판한다.
유신시대를 거쳐오면서, 한국 영화는 고질적인 병을 새로 얻었다. 외화 수입의 조건으로 한국 영화를 의무 제작하도록 하는 제도가
그것이었다. 가뜩이나 소재 제한과 검열로 창작욕이 식어 있던 차에, 아무렇게나 값싼 영화 한편을 찍어내면 외화 수입 권리가 주어져 떼돈을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수입업자와 제작업자 완전 분리를” 이 때 생긴 고질병은 지금껏 고쳐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많은 한국 영화들이 대충
만들어지고, 수입업자들은 외화 수입에 더 열을 올리는 것이다. 이같은 병폐를 치유할 대안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 황기성 정지영 등
여러 영화인이 제기한 다음 지적은 의미 있어 보인다.
“현재 외화 수입업자들은 외화 흥행 수익금으로 좋은 우리 영화를 만들자고 외치지만 이 주장은 이제까지 말잔치에 그쳤고, 앞으로도
지켜질 것 같지 않다. 따라서 아예 수입업자와 우리 영화 제작업자를 완전히 분리하고, 전자에게 세금과 영화진흥기금 등을 부과해 이 기금으로 전문
제작업자를 지원하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극장을 외화 전문관과 우리 영화 전문관으로 나눠보자는 견해도 있다.
문제는 정책 의지와 영화계의 각성 노력이다. 지난 11월5일‘쿼터 사수비대위’는 문화 체육부를 방문해 문화체육부로부터“올해
조처는 시행하되, 내년부터는 제도에 대해 본질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냈다. 이날 문화체육부를 방문했던 영화 평론가 이정하씨는“여전히
미봉책일 뿐 적극적인 영화 진흥 의지는 희미하다”라고 말했다.
스크린 쿼터 파문이 커져가는 가운데서도 단성사?피카디리?그랑프리처럼 의무 상영 일수를 준수하면서 흥행에 앞서 나가는 극장들도
많다. 그 뒤에 <서편제> <하얀 전쟁> <장군의 아들> 결혼이야기> 같이 외화에 맞서 당당히 키재기를
하는 한국 영화들이 있음은 물론이다. 宋 俊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