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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균 수채화 30년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 가운데 수채화라는 장르가 새삼스럽게 부상되었다. 사실 그동안 미술계의 관행에 따르면 수채화는 중심권 밖이었다. 중고등하교 미술시간의 학습용 수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미술 입문생들은 수채화로서 미술의 맛을 느낀다.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작가의 대열에 끼게 되면 수채화와는 담을 쌓고 지내게 마련이다. 아니 미술 대학생만 되어도 수채화 붓은 쓸모가 없게 된다. 과연 수채화는 작가로 가는 길목의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고 하단에 수채화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협회도 있고 간혹 수채화전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왜 주목을 받지 못했는가. 무엇보다 역량 있는 수채화 전문 작가가 드물었다는 뜻일 것이다. 아니면 유화가가 어쩌다 수채화 붓을 든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수채화는 우리 겨레의 정서와 들어맞는 데가 많다. 수채화는 수묵화처럼 물에 의해 용해되는‘물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물 그림은 우리들의 전통적 정서와 통하는 바가 많다. 동물성적인 서양 유화와는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  수채화는 수묵화처럼 물의 농도나 필세(筆勢) 등으로 그림의 맛을 낸다. 대개 덧칠하거나 지우고 다시 그릴 수가 없다. 유화처럼 인위적인 측면이 제거되고 깔끔하면서도 간결한 맛을 자아낸다. 하기야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사람들은 왜‘한폭의 수채화 같다’라고 말할까. 수채화의 명징함은 그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수채화는 18세기와 19세기초 영국에서 빛을 보았다. 터너와 콘스터블 같은 작가도 나타났다. 하지만 신인상주의시대 이후부터 점차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채화의 역사는 거의 유화의 역사와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20년대 대구에서 서동진이 수채화 개인전을 열 정도였다. 그의 제자 이인성이나 김용조도 수채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이인성은 뒤에 수채화에서 유화로 표현 매체를 ‘발전’(기존 미술 평론가들의 표현) 시켰다.  그동안 수채화를 그려보지 않은 화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도 수채화만 고집하는 화가는 매우 드물다.  수채화처럼 취급하기 쉬운 표현 매체도 없을 듯하다. 그러나 수채화처럼 못 그린 그림을 보아주기 어려운 매체도 없다. 차원을 높이기가 몹시 어려운 장르이다.

 수채화는 결코 미술계의 변방이 아니다. 표현 재료에 대한 지나친 결벽증이나 맹신은 재고해야 한다. 성공한 수채화 한폭이 얼마나 우리들을 기분좋게 하는가.
尹凡牟 (미술 평론가·경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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