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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균 수채화 30년전> / 다양한 소재, 민중의식 담아

화가 姜連均(53)이 서울에 입성했다.0광주를 지켜온 작가’로 불리면서 지난 30년간 고향에 묻혀 작업해온 그가 서울이라는 두터운 城 속에 11년만에 들어와 <강연균 수채화 30년전>이라는 깃발을 꽂은 것이다. 10월27일 ~11월27일 서울 다동 동아갤러리(778-4872)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는 지난 9월 광주전의 이변이 또 벌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30년 화업을 한눈에 보여주는 같은 제목의 광주전에서는 관람객 1만명이 몰려 전시 기간이 사흘 연장되는‘예기치 못한 사태’가 있었다. 소설가 송기숙씨(전남대 교수) 같은 이는 이를‘돌풍’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강연균의 작품은 99%가 수채화이다. 한국 화단에서 항상 뒷전에 밀려 있던 수채화(91쪽 상자 기사 참조)에 사람들이 그렇게 집중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림을 보는 즐거움 때문이다. ‘한국적 사실주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미술 평론가들의 강연균 평은 바로 우리의 땅과 사람, 그리고 꽃을 치밀하게 그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광주전과 마찬가지로 1백점이 넘는 작품이 나와 강연균이 걸어온 궤적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인습에서 과감히 탈출한 ‘반골’
 작가는“때로 수채화 그리는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너무 힘이 들었다”라고 말한다. 작품 세계를 스케일 있게 전개하는 데 제약이 따르고 물감이 엷어 회화적 결점이 그냥 드러나는 데다 한번 구상하면 개작이 어렵다는 기법상의 어려움도 있지만, 수채화를 경시하는 질긴 통념은 수채화가로서 넘기가 쉽지 않은 벽이었다. 그러나 강연균은 수채화만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등록금이 없어 다니던 대학(조선대)도 2년 만에 그만두어야 하는 가난함 때문에 비싼 유화물감을 살 수 없던 탓이기도 했지만 강연균이 수채화와 그토록 질기게 씨름해온 것은 그의 ‘반골 기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많은 동료 화가가 유화로 매체를 바꾸고, 한국 화단에서 모더니즘이 판을 치고 유행할 적에도 그는 오로지 사실적인 수채화를 고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화는 내 그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체로 그림을 따지는 인습은 우리나라뿐이다. 매체보다는 회화적 성과가 더 큰 문제이다.” 강연균은 “수채화가 왜 이렇게 비싸냐” 하고 묻는 습관적인 질문에 “수채화니까 비싸다”라고 대답한다. 그의 수채화는 비싼 만큼 단순하지가 않다. 그는 수채화라는 장르의 인습에서 과감히 탈출해 금기사항을 깨기도 한다.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번지기와 겹치기를 자유롭게 구사하는가 하면, 연필과 목탄, 콘테를 강하고 진하게 사용하면서 또 그것을 수채 기법과 조화시키는 등 강연균의 회화에는 변화 있는 기법이 동원되고 있다.  강연균의 다양함은 그림의 소재에까지 이어진다. 정물과 풍경, 인물이 있는가 하면 여체를 아름답게 드러내는 누드와 공주항쟁의 처절함을 담은 <하늘과 땅 사이> 연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세계에 들어오지 못할 소재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주장하는 리얼리즘을 이렇게 정의한다.“형태를 구태의연하게 닮게 그리는 건 리얼리즘이 아니다. 존재의 의미까지 그리려는 치밀한 제작 태도가 진정한 리얼리즘을 가능하게 한다.”  강연균의 화업을 꼼꼼하게 살핀 미술 평론가 이태호 교수(전남대·미술사)는 작가의 변화를 이렇게 분석한다.“강연균의 회화는 80년을 전후해서 뚜렷한 획이 그어지고 비로소‘잘 그린 그림’탁월한 기량‘ 등의 표현을 뛰어넘어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의 힘을 얻은 것으로 평가된다. 강연균의 예술 세계에서 5월 민중항쟁의 의미는 그처럼 각별하다.”  강연균에게 5월 광주는 부끄러움과 번민과 좌절감을 안겨준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었다. 그의 회화가 80년대에 태동한 민중미술로 분류되는 것도 광주항쟁에서 얻은 뼈저린 체험 때문이었다.“5월26일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온 날 나는 그냥 집에 들어갔다. 밤 9시께였다.” 그는 가정도 재산도 없는, 서민적 민중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자책감 속에서 수없이 번민해야 했다.  ‘화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번민 끝에 나온 작품이‘광주의 게르니카’라 불리는 5월항쟁도 <하늘과 땅 사이>이다. 81년 민중미술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무렵 5월 광주를 최초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서울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린 <8인 구상작가 200호 초대전>에 내걸렸다. 피해자들의 시체가 뒹굴고 공포에 질린 모습, 총칼에 가슴팍을 맞고 쓰러진 사람을 부둥켜안고 치떠 보는 분노에 참 모습 등이 담긴 이 작품을 보고 서울의 미술 관계자들은 경악했다.“제목 때문에 고심을 하던 차에 불현 듯‘하늘과 땅 사이’가 떠올랐다. 하늘과 땅 사이에 저런 비극이 또 있을까라는 의미였다.”  그 이후 떡장수 할머니를 비롯해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서민과 남도 풍경들은 5월 광주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나는 80년 5월 광주 거리에서 역사를 터득했다.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헐벗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서민의 삶에서 이상하게도 건강함을 보았다. 그리고 애정이 갔다. 광주의 땅과 밭두렁 하나도 의미있게 다가왔다.”  세밀한 필치로 주위의 서민을 그림에 담기 시작했지만 작가는 직설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서민의 꾸밈없는 표정을 처음 그린 <떡장수 할머니>는 ‘투사처럼 눈물을 흘리고 한탄을 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한 데서 시작되었다.‘이걸 한번 그려야겠다고 마음 먹고 살아가는 얘기며, 가정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얼굴, 그리고 표정에서 바로 이 시대를 읽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스케치 여행을 하면서 깊게 패인 언덕빼기며 황토언덕에 나 있는 질기디 질긴 아카시아 뿌리 등을 만나면서 그는 굉장한 애정과 호기심을 가졌다고 했다. 남도의 땅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호박꽃?분꽃?맨드라미?박과 같은 역시 소외된 꽃들에게도 이어져 그의 화폭을 채웠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의 그림이 민중미술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지만, 한번도 민중미술가임을 자처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화가라면 무엇보다 우선 대중을 감동시키고 박수를 받을 만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80년대 민주화를 외치다 사람들이 죽어간 참담한 거리를 거닐면서도 거리에 있는 국화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고, 도 그렸다”고 그는 말했다.  강연균 작품세계의 다양함은 누드까지 그영역을 확장한 데서도 볼 수 있다. 테마주의 혹은 스타일리즘을 싫어한다는 그는“여자의 몸이라는 소재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한다. 여체는 죽은 자연이 아니라 씨를 뿌리면 싹이 나는 생명력 있는 땅으로도 해석된다”고 말했다.

“그림은 결국 아름다워야 한다”
 강연균의 작업은 남들이 훈련 과정쯤으로 여기는 소묘로부터 시작된다. 신문 소설의 삼화를 그려도 모델을 세운다.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왕 인 박사 기록화를 그릴 때는 40여명의 모델을 동원하기도 했다. 복식 연구가의 도움을 받아 그 시대 옷을 입히고 포구에서 재현을 하게 하면서 스케치했다는 것이다. 그는 수채화로써 경지를 이뤘다는 평을 듣는 지금도 데생을 열심히 한다. 데생을 소홀히하면 가짜 그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스승 오지호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강연균은 지난해부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공도의장과 황석영석방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도“그림은 결국 아름다워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대중의 사랑과 박수가 없으면 운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민중미술의 90년대를 침체기로 보지 않는다. 편 가르기를 지양하는 일관된 입장을 취해온 그에게는 침체기가 아니라 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로 여겨지는 것이다.

 ‘누구에게 심사받는 것이 싫다’는 자존심 때문에 국전 같은 관전을 거부하고 중앙집권적 문화 행태를 보이는 서울도 거부했던 그는 고향에 있는 게 더없이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텃세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는“작가 역량에 따라서 그 손해는 얼마든지 희석시킬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서울에서 <수채화 30년전>을 열면서 손해를 희석시킨 역량을 보여주는 강연균은 화업 30년을 정리하는 이번 전시회와, 때맞춰 발간한 화집을 통해 뒤를 돌아본 뒤 전통 수묵의 먹을 사용해 그림을 그릴 채비를 하고 있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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