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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없는 자애, 게으름.사치엔 불호령… 말년엔 아이들 가까이

 대한불교 조계종 제8대 종정이자 해인총림 방장인 성철 큰스님이 11월4일 아침 이슬에 젖은 가야산 단풍길을 뒤로 한 채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법랍 59세, 세수로는 82세였다.  가야산 海印寺. 이른바 佛寶 사찰 通度寺, 僧寶 사찰 松廣寺와 더불어 法寶 宗刹해인사는 한국의 3대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를 일러 특별히 법보 종찰이라 하는 까닭은 고려대장경 곧 팔만대장경이라는 無上 법보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에 있던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이 해인사에 들어온 것은 1398년. 팔만사천법문을 새긴 이 경판 중 세 판이 지난 11월 3일 6백년 만에 처음 바깥 나들이를 했다. '93년 책의 해’를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책문화 특별전’에 특별히 선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방장 스님의 허락을 받고서였다. 그러나 그 뜻을 헤어릴 길없는 세간에서는 그 직후 오비이락으로 방장스님이 열반에 든 것을 두고 이런저런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이런 뜬소문에 기대더라도 결국 큰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전산화가 진행되고 있는, 목숨보다 더 아끼는 팔만대장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의 촉구인 셈이다.  성철 큰스님은 이런 유언말고도 가야산 단풍잎처럼 많은 유언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지난 9월에 발간된≪선림고경총서≫37권과 ≪백일법문≫≪선문정로≫≪본지풍광≫ 등 법어집 열한권은 한국 불교사의 크나큰 업적으로 기록된다. 이런 役事는 모두 큰스님이 말년에 허락한 것들이다. 큰스님은 생전에 늘 때우고 기워 쓰던 고무신과 바리때말고는 아무런 재화를 남기지 않은 것처럼 말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이러한 큰스님도 말년에는 상좌들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번뇌를 주체할 수 없는 중생들이 죽음을 초월한 경지에 있는 큰스님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인연’이 되었다.  유일하게 접근이 허용된 사진작가 주명덕씨가 85~88년 3년 동안 찍은 ≪泡音乐相册≫도 성철 스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사진집이다. 圓澤 스님의 말대로 “흰눈송이가 송이송이 내려 쌓이는 눈밭처럼 그 동안 성철 스님이 걸어온 모습들이 갈무리된” 이 책에는 8년 長生不臥하고 용맹정진하는 성자의 면모와 함께 말년에 이르러 이따금 <목포의 눈물> 같은 속세간의 노래를 부르는 인간의 흔적도 담겨 있다. 성철 스님의 상좌로서 해인사 총무 일을 맡고 있는 圓澤스님이 사승에게 억지 춘향으로 밀어붙인 것이지만, 이것이 없었다면 중생들은 큰스님의 인간적인 여백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찍기로 했으면 그만, 사진 보아 뭤하나”
 법정 스님은 '백련암 큰스님’이 사진찍기를 허락한 것을 두고 '연륜이란 이렇듯 사람을 변모시키는가. 서슬이 시퍼렇던 젊은 날의 기상도 노년에 이르면 부드럽고 푸근해지는 건가’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큰스님 사진을 찍던 첫날의 일화에서도 그 원숙함의 체취가 느껴진다.

 단 1배를 안하고도 허락을 받은 주명덕씨는 스님이 기거하고 있는 백련암에서 사진을 찍은 뒤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에 올 때는 오늘 찍은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때 가서 제가 스님 모습을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다시 찍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큰스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찍기로 했으면 그만 이지 사진은 보아서 무엇하는가.”  성철 스님은 생전에 상좌 서른여섯과 그 상좌들의 상좌 스물일곱을 두었다. 상주 격인 상좌들보다 손자승의 수효가 더 적은 까닭은 늦게 아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천재?성일?만수?삼밀 등 4명을 빼고는 모두 둥글 圓자 돌림으로 둔 상좌승들은 상좌 두기를 간청하는 주변의 부탁을 못이겨 나이 60이 넘어서 둔 아들들이다. 상주로서 분향소(窮玄堂)를 지킨 이들이 네 번째 원명부터 막내 원종에 이르기까지 거의가 30~40대 소장스님들이라면, 장손 일륜부터 끝손자 일형까지 堆雪堂에 안치된 법구를 스물네시간 불철주야로 지키는 이들은 20대 청년 스님들이다.  사승에 대한 일화 또한 단풍잎처럼이나 무궁무진하다. 속세간에도 널리 신화처럼 살아 있는 대표적 일화는 8년 간의 장좌불와이다. 큰스님은 백련암 제자들에게도 3시간 이상자지 말고 참선하라고 가르쳤다. 큰스님 스스로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잠을 많이 자지 말 것 △말을 하지 말 것 △간식하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해제중에도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 것 등 5계에 어긋날 때는 심한 산청 사투리로 일갈하거나 주장자로 두들겨패기가 다반사였다.  큰스님은 게으름과 사치를 몹시 싫어했다. 백련암 원주 일을 맡고 있는 원구 스님이 하루는 큰스님 공양을 마친 뒤 바리때 곁에 놓인 이쑤시개를 무심코 버렸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그 이쑤시개는 큰스님이 10년이나 쓰던 것이었으니 맞아도 싼 셈이었다. 원순 스님이 사승의 밑씻개를 치우러 변소에 들면 늘 사각형으로 가지런히 개켜 쌓인 화장지를 볼 수 있었다. “똥보다 중생의 마음이 더 더럽지 않느냐‘는 가르침이었다.  원구 스님이 기리는 사승의 모습은 '말하는 방법보다 침묵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분’이다. 큰스님은 늘 생식으로 일관했는데, 밥 한 숟가락에다 들기름에 오래 절인 검정콩과 솔잎가루를 섞어 들었다. 이같은 소식과 때운 검정고무신 그리고 기운 법복은 백련암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자기가 사승한테서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은 아둔한 제자였을 거라는 원통 스님은, 백련암 시절에 등에서 지게 벗을 날이 없을 만큼 울력할 때는 야단치신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소리를 통해 말씀을 깨우쳐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큰스님은 욕설도 곧잘 했다. 원순 스님은,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마른 하늘에 벼락치듯 불호령을 내렸지만 “이 쌍놈의 자석들아’ '신자 밥만 축내는 빌어먹을 놈들’같은 욕설 속에도 돌이켜보면 깨우침을 위한 복선이 깔려 있었다고 말한다. 흔히 임제종의 가풍을 얘기할 때는 종문의 대표적인 본분수단으로 임제의 '할’(喝, 꾸짖음)과 덕산의 '봉’(棒, 방망이)에 견주어 말한다. 원융 스님은 서산대사가 ≪선가귀감≫에서 임제 가풍에 대한 '임제종을 알고자 하는가.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치고 평지에 파도가 이는도다’라고 한 말을 인용해 설명한다.  책을 읽지 말라는 계는 참선하는 데 책은 눈엣가시 같은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정 스님은 그 계에 담긴 뜻을 이렇게 풀이한다. 그 뜻의 해석에 대한 차이는 이른바 돈오돈수?돈오점수라는 방법론상의 차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백련암 큰스님은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으신 분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20세기에 들어와 현존하는 출가 스님 가운데 가장 책을 많이 읽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책 읽지 말라는 것이 책을 가장 많이 읽으신 분의 말입니다.”  큰스님은 종정이면서도 종단 행사에 나타나기는커녕 종단 운영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한 적이 없었다. 상좌들에게 늘 '시주 도둑놈’ 소리를 하듯 큰스님은 종단 스님들은 공부인이 아니라고 여긴 듯하다.  이렇듯 지엄한 큰스님이었지만 공부인에게는 마음 씀씀이가 자애로웠다. 종정이 계신 곳이라 신도들로부터 귀한 공양물이 끊이지 않았으나, 썩은 것은 늘 백련암 제자들 차지이고 좋은 것은 정진하는 스님들에게 내려보냈다고 한다. 백련암 큰스님은 '아둔한 제자’들을 쪼다라고 불렀고 백련암의 쪼다들 사이에서도 큰스님이 '큰바보’로 통했다.

꼬마와 박치기하다 이마에 상처도
 큰스님이 속세에 남긴 유일한 한점 혈육은 不心 스님(55)이다. 큰스님이 출가한 뒤 '유복녀’로 태어난 이 딸은 지금은 해인사 금강굴 주지 스님으로 비구니들을 가르치고 있다. 큰스님이 금강굴에서 요양중일 때도 행자승 말고는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금강굴에서 부산대 부속병원에 입원할 때도 불필 스님은 아버지를 향한 애틋한 연모를 내비쳤으나 그 대신에 불필의 상좌승인 선호 스님으로 수행케 했다.

 지난해 큰스님은 포행(산책)중에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다름 아닌 절 아랫마을 아이들이 누가 더 이마가 센지 내기를 하자고 졸라 박치기를 하다 입은 상처였다. 이밖에도 큰스님과 아이들과의 인연은 참 많다. 어느해 설날에는 고막에 이상이 생겨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산중 암자에 있는 꼬맹이들이 큰스님께 세배를 왔다가 스님께서 무어라고 물으니, 한 꼬마가 스님의 무릎 위에 올라가 귀에다 입을 대고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만 그렇게 된 거였다. 이 때묻지 않은 꼬마 부처가 법상에서 할 (喝)을 하는 큰스님의 흉내를 내느라 그랬던 거였다.

 사부대중들은 3천배를 한다 해도 큰스님을 뵐똥말똥했으나 아이들에게는 늘 무시로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좌선중일 때를 빼고는 큰스님 곁에는 늘 아이들이 떠나지를 않았는데, 동심의 눈에는 성철 스님이 친구로 비치듯 큰스님에게는 아이들이 부처로 보였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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