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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태고로부터 ‘우리’라는 심적인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다. 산야에서 먹이를 찾아서 사냥을 하면서 거처를 옮겨야 하던 원시시대는 몰라도, 농사를 지으면서 한곳에 정착하게된 때부터는 ‘우리’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삶의 기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산업화됨에 따라 ‘우리’라는 의식의 범위는 확대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땅에도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우리’의 울타리를 어느 선에서 획하느냐 하는 문제가 새삼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것을 핏줄을 통하는 친척에 한정하느냐, 아니면 혈연의 울타리를 넘어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생활감정을 가진 넓은 생활공동체에까지 확대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특히 산업화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대규모 조직인 학교나 군대 같은 특수집단에서의 공동생활이 자아내는 끈끈한 붕우적인 유대나, 어느 고을에 있는 어느 특정 학교에서 같이 자란 동창관계 같은 것에 국한 시켜서, 독특한 “끼리”의 울타리를 형성해보자는 충동도 생기는 것이다.

“우리 집안·군인 출신 대통령은 이젠 족하다”
 이런 것들이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하려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혈연·지연·학연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런 관점에서보면, 근대화란 것도 필경 처음에는 좁게 인식되던 ‘우리’라는 울타리가 하나하나 헐리면서 그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는 과정이라고 개념화할 수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노태우 대통령이 근친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언명했다는 말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가 지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도에 의하면, 노대통령은,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은 나만으로 족하다”라고 말하고, 동시에 “군인 출신도 나까지 세 번이나 대통령을 했으니 이젠 그만하면 족하다”라고 언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의미있는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二足情神’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선언은 우리 사회의 의식과 가치체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중요한 발상의 전환으로서 족히 우리 헌정의 룰을 바로잡아놓았던 저 6·29 선언과 맞먹는 의미있는 전환점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사회의식면에서 근대화를 크게 전진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 전환점은 새로운 기대를 낳는다. 우리사회의식의 근대화에 정말 획을 그으려면, ‘二足’으로서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 더 보탰으면 한다. “같은 고을 출신이 세 번이나 대통령을 했으니, 이젠 이것으로 족하다”라고 첨언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국민의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주는 대정치가다운 (Statesman-like)행동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와 같은 ‘三足情神’은 온 사회에 커다란 공감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내친 김에 ‘三足 ’을 마저 채워주기를 전국의 보통사람들은 노대통령에게 기대한다. 60년대 이래 이 사회를 주름잡아온 특정 고을 출신은 이젠 그만하면 족하다는 생각이 전 국민사에서 퍼져 있는 이때에 그 판정을 노대통령이 손수 내린다면, 그분은 정말 보통사람들의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같은 고을 출신 대통령도 이젠 족하다”고 보탰으면…
 이것은 일부 인사들로부터는 ‘배반’이라는 비난을 받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혈연이나 학연을 끊는 것도 배반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것은 다 ‘고상한 배반’에 속하며, 필경 근대화나 민주화라는 것은 지도층으로부터 이런 ‘고상한 배반’을 요구해 마지않는다. 지도층이 용기를 발휘하여 이런 ‘고상한 배반’을 해낼 때 사회는 양적인 갈등에서 탈출하여 질적인 전환으로 전진해나간다. 이것이 우리가 노대통령에게 비범한 지도력을 기대해보는 까닭이다.

 지도자들이 단순히 혈연·학연·지연에 얽매인 술책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일반 국민도 그 수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지도층이 한번 근친과 동창과 동향을 초월하여 ‘우리나라’ 전체를 생각하고 그 확대된 ‘우리’를 위해서 신명을 바칠 때, 비로소 온 국민도 ‘우리’의 울타리를 넓히고 동서와 남북의 벽을 넘어서 민족공동체의 비전을 나누어 가지고 민족의 통일과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혼연히 동참할 것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21세기를 향하여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고, 한반도에는 통일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보기 드문 역사의 돌파구가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여 민심을 규합하고 민족통일의 길을 여는 일이 지도자의 으뜸가는 과업일 것이며, 그런 과업의 핵심은 ‘우리’의 범위를 극대화시키는 일이다.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더 큰 ‘우리’를 공감할 수 있는 심적 상태, 이것이야말로 민족 통일의 참된 기초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서 도덕적 차원의 과제이며, ‘三足정신’과 같은 높은 도의를 표방하는 지도자라야 국내적으로는 산산조각이 되어 있는 민심을 수습하여 하나의 ‘우리’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요, 대외적으로는 만방의 존경을 받게 되어 민족통일을 위한 막을 수 없는 도의적 분위기를 안팎으로 창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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