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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대권 이양 위한 인적·물적 토대 만들기 ‘박차’

 
세간의 눈길이 삼성그룹에 쏠려 있는 사이에 현대·기아자동차 그룹 안에서는 후계 구도를 위한 정지 작업이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 사장이 후계자로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기반을 다지고 경영자 이미지를 굳히는 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9월20일 그룹 사장단 인사를 실시했다. 8월에 최한영 사장과 이재완 부사장 인사를 단행한 지 한 달 만의 일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주요 경영진 인사는 지난해 8월 이후 최근 1년간 거의 매달 있을 정도로 잦았다. ‘MK식 수시 인사’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수시 인사를 놓고 세간에서는 해석이 분분했지만 ‘가신을 믿지 못하는 MK식 후계 구도 정지 작업’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현대자동차그룹 사정에 밝은 한 재계 인사는 “왕자의 난으로 곤욕을 치렀던 정몽구 회장은 ‘가신’의 필요악을 누구보다 잘 안다. 아들에게 경영권을 순조롭게 물려주기 위해 그는 일찍부터 가신들을 잘 ‘요리’해 왔다. 실권을 주더라도 오래 주지 않고, 황태자를 가릴 만큼 커버린 가신은 쳐내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2001년 잘 나가던 이계안 현대자동차 사장을 현대캐피탈로 보낸 것이나, 현대자동차 사장에 올랐던 이들이 평균 2년을 채우지 못한 것이 단적인 예라는 것이다. 특히 정몽구 회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최측근인 박정인 현대모비스 회장을 비롯한 옛 현대정공(현대모비스) 출신들에 대한 최근 인사는 아들을 위한 세대 교체라고 덧붙였다.

“황태자 가릴 가신은 쳐낸다”

최근 인사에서 1세대 가신들이 뒤로 물러난 대신 정의선 사장 주변에는 젊은 인력이 대거 모였다. 정의선 사장은 기아자동차의 기획 부문과 재무팀을 대폭 보강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자동차의 젊은 임원들을 기아자동차로 불러들였다. 현대자동차 IR를 맡아온 재무팀 김득주 이사를 기아자동차 재무관리실장으로, 현대자동차 홍보실 출신인 김방신 이사를 경영전략실장에 임명했다. 한 애널리스트는 “이번 인사를 보면 정몽구 회장 아들에게 후견인이 필요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아울러 지금부터 사람을 직접 키워보며 경영자로서 입지를 강화해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라고 귀띔했다. 

증권가에서는 내년 3월 주총 이후 정의선 사장이 기아자동차에 이어 현대모비스 대표 이사로 선임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장차 자동차 그룹을 이끌려면 완성차뿐 아니라 부품도 공부해야 하고, 그룹의 지주 회사 격인 현대모비스에서 입지를 다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 애널리스트는 “최근 인사에서 박정인 회장의 빈자리를 메울 만한 인물을 현대모비스에 배치하기보다는 연구 개발에 강한 한규환 부회장과 재무통 정석수 사장의 투톱 체제로 가져간 것도 내년쯤 정의선 사장을 모비스의 대표이사에 앉힐 생각이 아니겠느냐”라고 분석했다. 

정의선 사장은 아버지의 배려 속에서 코드가 맞는 젊은 임원들과 함께 경영자로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인적 토대를 다져가고 있는 셈이다.

 
정의선 사장이 '대통‘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인적 토대 못지않게 물적 토대도 다져야 할 처지다. 경영권 승계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삼성그룹과 달리 현대자동차그룹은 정의선 사장으로 승계하는 작업은 걸음마 단계다. 삼성그룹의 핵심 지분을 모두 쥔 삼성전자 이재용 상무와 달리,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사장은 핵심 계열사의 지분이 거의 없다. 상장 계열사 가운데는 현대자동차 주식 6천4백여주와 기아자동차 지분 1%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엠코·글로비스 등 비상장 계열사 지분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이들 회사는 지분구조상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다(표 참조).

그래서 현대자동차그룹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경영권 승계를 위한 각종 지분 이동 시나리오가 시도되었지만 정부 정책과 시장의 반대로 번번이 주저앉아야 했다. 겨우 찾아낸 방법이 비상장 계열사를 통한 ‘총알’ 만들기다. 현대자동차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정몽구 회장은 탈법·불법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룹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시장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지분을 사들인 뒤 최대주주의 지위를 확보하는 게 뒤탈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다만 상속세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비상장 계열사들을 통해 자금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에 따르면, 정의선 사장은 2001년부터 지금까지 비상장 계열사 네 곳을 통해 총 4천8백95억여원의 이익을 얻었다. 본텍·글로비스·엠코·오토에버 등에 정의선 사장이 지분을 투자한 뒤 그룹의 일감을 몰아주어 해당 기업을 키워 얻은 수익이다(표 참조). 이들 기업에 정의선 사장이 투자한 금액은 모두 5백94억여원인데, 투자 대비 8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최대 주주 되기에 주력

예컨대, 정의선 사장은 2001년 말 15억원을 투자해 본텍 지분 30%를 액면가 5천원에 인수했다. 4년 동안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그룹의 물량을 대거 받은 이 회사는 고속 성장했고, 정의선 사장은 갖고 있던 이 회사 지분 30%를 독일 지멘스에 매각해 5백70억원을 벌었다. 5천원에 샀던 정사장의 지분은 주당 9만5천원에 팔렸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정사장은 글로비스에서도 지분 매각 이익 1천억여원을 얻었다.

특히 현대자동차그룹은 글로비스를 내년에 상장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글로비스가 상장될 경우 여전히 40%라는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진 정의선 사장은 이 회사로부터 훨씬 더 큰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차량 탁송 업무를 맡고 있는 글로비스는 지난해 매출액이 9천여억원, 당기순이익은 6백96억원이다. 2003년보다 각각 55.9%, 72.7% 늘었다. 증권업계에서는 기업 가치를 분석해 보면 글로비스의 공모가격이 주당 20만원을 호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의선 사장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다른 비상장 계열사를 연이어 몇년 안에 상장한다면 정사장의 ‘재테크’는 계속 날개를 달 수밖에 없다. 특히 올해 4백50여억원을 증자해 종합건설 부문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엠코가 글로비스 다음에 상장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의선 사장은 엠코의 최대 주주다.  

하지만 정의선 사장의 재테크가 복병을 만날 가능성도 높다. 심상정 의원을 비롯한 몇몇 국회의원과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이 비상장 계열사로 인한 이익을 정의선 사장이 고스란히 가져갈 수 있도록 두고 보지는 않겠다며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상정 의원은 “비상장 계열사의 이익을 정의선 사장이 가져가는 것은 회사 기회를 편취하는 신종 변칙 증여 방식이므로 철저하게 과세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회사 기회 편취란 현재 회사의 사업 범위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유망한 사업 기회가 있을 때 이를 회사에 귀속시키지 않고 지배 주주 이사 또는 경영진이 수행해 이익을 얻는 것을 말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한성대·무역학)도 “세법과 상법체계 등 가능한 법을 모두 검토해서 비상장 계열사를 이용해 현대자동차그룹이 변칙적으로 세습되는 것을 막을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정의선 사장 ‘재테크’에 제동 걸릴 수도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영권을 정의선 사장이 이어받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장은 “정의선 사장은 단기간에 상장 계열사의 지분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분 상속보다는 먼저 내부 지배권을 강화하고 경영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경영권을 물려받아야 할 처지이다”라고 말했다. 즉 법적 상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룹 안팎에 경영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선 사장은 이미 그 시험대에 올라 있고, ‘실험 대상’은 기아자동차이다.
정의선 사장이 기아자동차 대표이사로 선임된 뒤 이 회사의 주가는 신나게 올랐고 ‘정의선 이펙트’라는 말까지 나왔다. 기아자동차의 실적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지만 정의선 사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가가 많이 오른 것이다.  

기아자동차는 그동안 그룹 내에서 ‘서자’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성·마케팅·브랜드파워 등 모든 면에서 현대자동차에 크게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자동차 조사 기관인 JD파워에서 현대자동차들이 상위 톱10 안에 들 때도 기아자동차들은 바닥에서 톱10 안에 들어야 했다. 현대자동차와 모델을 공동 개발하고 생산 공장만 다를 뿐인데도 브랜드 파워가 약하다 보니 품질 조사에서도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또 현대자동차의 영업이익률은 7~8%가 나오는데, 기아자동차는 겨우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수준이었다.

‘서자’를 그룹의 어엿한 ‘효자’로 만드는 것이 정의선 사장에게 부여된 과제다. 기아자동차를 효자로 만들기 위한 정사장의 전략은 유럽 시장에서의 고속 성장과 기아자동차의 고질적인 문제인 고비용 구조 해소다.

정사장은 한 달에 보름 이상을 슬로바키아에 나가 있을 정도로 슬로바키아 공장 짓는 일에 ‘올인’하고 있다. 기아자동차는 중국, 인도, 미국 앨라바마 등에 성공적인 공장을 가진 현대자동차와 달리 변변한 해외 공장이 없다. 중국 시장에서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소형차 중심인 유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유럽 시장에서 3년 연속 50%씩 성장하고 있고, 내년에는 현대보다 더 많은 물량을 수출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한화증권 리서치센터 안수웅 연구위원은 “슬로바키아 공장은 기아자동차의 첫 유럽 공장이자 유럽 시장에서 확실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교두보가 될 것이다. 특히 슬로바키아 공장을 완공하면 물류비와 관세를 합해 12~13%를 절약할 수 있으니 기아자동차는 유럽에서 더 약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유럽 공략·노사 문제에 ‘올인’

기아자동차는 가동률이 적고 고정 비용 지출이 높아 영업이익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정사장은 기아자동차가 ‘아무리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임을 인지하고 대표이사 취임 직후부터 강력한 비용 절감 전략을 펼쳤다. 기아자동차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비용 절감을 달성하지 못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슬로바키아 공장을 무사히 완공해 ‘유럽에서만큼은 현대보다 기아가 낫다’는 것을 보여주고, 기아자동차의 고비용 구조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정의선 사장의 경영 능력은 일정 부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의선 사장이 경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은 노조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18년 역사에 열일곱 번 파업했을 정도로 현대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다. 최근 현대자동차는 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박사팀에 ‘건전한 노사 관계를 위한 연구’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박태주 박사는 “임금 체계나 노동 시간 등에 대한 이슈별 연구 프로젝트는 있었지만 노사 관계 전반을 들여다보는 연구 프로젝트를 발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현대자동차 경영진 내부에서는 현재의 노사 관계로는 글로벌 기업으로 약진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를 발주한 또 다른 배경에는 노사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보려는 정의선 사장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프로젝트를 발주한 당사자는 윤여철 사장이지만 정의선 사장도 정몽구 회장을 설득하는 데 지원 사격을 했다는 것이다. 

현대자동차에서 정사장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인사는 “정사장은 상당히 합리적인 경영자다. 카리스마를 갖고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합의를 도출하는 편이다. 그런 정사장이어서 노사 문제도 훨씬 합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사장이 그룹 내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사장은 자기 나름으로 시도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아직 아버지나 가신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계열 광고회사를 만들 때도 개인적으로는 지분 출자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묵살하는 바람에 40% 지분을 출자해 욕을 먹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먼 거리를 달려봐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시간이 지나야 사람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후계 구도 10년 프로젝트’라고 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장거리 경주에서 정의선 사장의 힘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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