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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사랑에 빠진 남자들:<너는 내 운명>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할리우드 엔딩>

 
이제부터 세 남자의 러브 스토리를 복기하겠다. 만일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워 있는 커플이나 모든 종류의 낭만적 거짓말에 속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독실한 로맨티스트라면 그냥 건너뛰어도 상관없을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이미 사랑의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시대에 종언을 선언하고 이제 남은 것은 ‘포기하는 것과 견디는 것’ 밖에 없다고 믿는 리얼리스트(라고 믿는 불쌍한 인생들), 아니면 권태기에 빠진 커플이거나 자기연민에서 허우적대는 솔로들이라면 빠져들 만한 희망적인 이야기다. 올 가을 유독 많은 사랑의 장광설 가운데 가장 담백하고 솔직하며 가장 진전된 형식의 영화, 믿어도 좋을 수작 연애담 세 편이 나왔다.

먼저 돈 키호테같이 사랑을 지키는 남자, 석중(황정민)이 있다. <너는 내 운명>이라는 낡고 닳은 어법을 구사하는 이 친구는 서른여섯의 우직한 시골 노총각이다. 티켓 다방 여자 종업원에게 석중은 한눈에 반해 애틋한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공식’에 의하면 그 둘이 생애 처음으로 찾아온 행복에 빠져있을 무렵, 포악하고 잔인한 옛 남자가 찾아와 협박 따위를 해야 한다. 거짓말처럼 영화는 그렇게 한다.

멜로의 문법에 철저한 <너는 내 운명>

 
결국 여인은 남편을 위해 떠나고 남자는 울부짖으며 방방곡곡을 헤매는데 이때 ‘신파의 정석’은 둘 중 누군가가 치명적 병을 앓고 있어야 한다고 일러준다. 이번에도 영화는 교과서에 충실하다. 여자가 에이즈 보균자란다. 세상의 편견과 가족의 만류를 무릅쓰고 이 남자와 여자는 맺어질 것인가.

돈 키호테는 끝까지 자기 앞에 놓인 거대한 존재가 ‘적’이라고 믿고,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그것이 풍차라고 손가락질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은 바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돈 키호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이 바보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믿는다. 이 굳건한 믿음은 관객을 속수무책의 행복감과 눈물로 인도한다.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이 만든 두번째 장편 영화 <너는 내 운명>은 ‘통속 멜로’를 표방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은 신파에 있지 않고, ‘사랑은 본질에 앞서는 실존’임을 보여주는 데까지 이른 깊이다. 운명이 개인을 복속시키고 사랑을 죽음에 봉인시키는 것은 신파이지만, 개인이 운명을 선택하는 한 사랑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앙가주망(engagement)의 의미에 더 가까운 행위다. 그것은 운명의 갈림길에서의 선택이며, 그 선택에 대한 믿음이며, 그 믿음에 의한 자아의 변화다.     이제 두번째 남자가 등장할 차례다.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의 태국 영화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의 주인공 겐지(아사노 다타노부)다. 가족과 고향, 뿌리와 생활에 단단히 밀착된 <너는 내 운명>의 석중과 달리 태국에 사는 일본인 남자 겐지는 익명의 도시에서 외로이 떠 다니는 섬 같은 존재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이 세상 마지막 존재가 된 도마뱀 한 마리’처럼 외로움에 지쳐 있는 겐지는 버릇처럼 자살을 시도하지만 우스꽝스런 이유로 매번 실패한다. 엉겁결에 겐지는 형을 살해한 야쿠자 조직원을 죽이고 우연히 한 태국 여인을 만나 동거하게 된다. 자살하려 하지만 결국은 이루지 못하는 남자와, 다른 곳(일본)에서 다른 생을 꿈꾸며 결국은 떠나는 여자가 만났다. 정리벽이 심한 일본 남자와 청소라곤 도통 모르는 한 태국 여자의 만남은 기묘한 멜로를 만들어 낸다. 각자를 감싸고 도는, 때로는 둘 사이에서 미묘한 파장을 만드는 내밀한 공기를 포착한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가 빛난다. 목질의 유머와 석화한 고독이 펼쳐진다. 코미디는 나무껍질처럼 퍼석퍼석하고 외로움은 돌처럼 굳어져 완강하며, 우주에서의 마지막 생은 타일 위에 똑 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는 것처럼 나른하지만, 그 리듬의 미묘한 시차는 변화를 늘 기대하게 한다. 자살처럼, 혹은 떠남처럼.

올 가을 멜로는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마지막은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는 남자, 우디 앨런과 함께다. <헐리우드 엔딩>에서 그는 오스카상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지금은 CF나 찍고 있는 퇴물 감독. 6천만 달러짜리 영화 연출 제의라는 천금의 기회가 오지만 옛 아내를 빼앗아간 남자가 제작자이고 옛 아내가 프로듀서. 갈등 끝에 감독을 맡지만, 신경증이 다시 도져 심인성 실명이 되고 결국 ‘눈 감고 영화를 찍는’ 촌극을 벌인다.

엉망인 영화로 인해 옛 아내 커플은 헤어지고 다시 둘의 사랑이 회복된다. 할리우드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장르는 쓰레기’라는 악평을 퍼붓지만, 프랑스는 환호한다. 자기 조롱과 연민에 빠진 신경증 환자의 자가 정신분석과 뉴욕·LA·할리우드·프랑스 영화에 관한 독설적인 논평. 우디 앨런의 최고작은 아니지만, 가장 웃긴 작품 중 하나다.

올 가을은 세 남자의 사랑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부러운 것은 그들 모두 엔딩’을 맞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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