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완용 증손자가 첫 시도…현행법은 후손에 유리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는 당시 인터뷰를 통해 이완용 명의로 남아 있는 토지를 찾아 ‘이완용 명예회복 재단’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보도는 국민의 수치감을 자극해 광복회 등 독립운동 유관 단체들의 규탄 집회와 항의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여론이 들끓자 서울지검 특수부는 이완용 땅찾기에 개입한 토지 브로커들을 집중 단속하기에 이르렀고, 증손자 이씨는 국민적 지탄에 쫓겨 캐나다로 떠났다.
이완용 후손의 재산 찾기 보도를 계기로 당시 국회에서는 김원웅 의원과 고 제정구 의원이 주도해 여야 의원 100여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민족 정통성 회복 특별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소급 입법이라는 위헌 시비에 걸려 빛을 보지 못하고 14대 국회 폐회와 함께 자동 폐기되었고 말았다.
이후로도 <시사저널>은 친일파 땅 문제를 계속 추적해 1996년 초에는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매국노 송병준의 후손들이 선대의 매국 장물을 찾기 위해 토지 브로커들과 결탁해 전국의 수백만평 토지를 놓고 이권 놀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국민적 지탄을 우려한 송병준의 일부 후손이 <시사저널>을 찾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당시 고 제정구 의원이 중개자가 되어 송의 후손으로부터 ‘국가 기증 동의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후손들 사이의 내분으로 합의를 이루지 못해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국민의 거부 정서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땅 찾기 문제를 해결할 뚜렷한 정치적·사회적 합의가 나오지 않자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때부터 을사오적·정미칠적 등으로 불리며 일제 치하에서 친일파의 수뇌급 역할을 한 이근호 이재극 윤덕영 이해창 이기용 남장희 등의 후손들도 잇달아 매국 장물 찾기에 가세한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친일파 후손의 손을 들어주는 경향이 강했다. 2001년 을사오적 이재극의 후손이 낸 소송에서 1심 법원은 이례적으로 ‘친일파 재산은 헌법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재산이라 할 수 없다’는 전향적인 판결을 내린 적도 있지만 항소심에서는 번복되었다.
결국 속수무책이던 친일파 후손의 땅 찾기 해법은 공론화가 시작된 지 13년이 지난 올 들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국회에 계류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과 민간이 주축이 된 기증 및 민족재단설립 운동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