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K, 연합군사령부 비밀문서 공개…존폐 얽힌 비사 60년 만에 드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던 야스쿠니 신사 폐지 문제를 놓고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연합군사령부와
야스쿠니 신사, 일본의 유족회 등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은 내용이 밝혀졌다. 올해 미국 오리건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된, 연합군사령부 관련 비밀
문서를 통해서다. 이 문서는 연합군사령부 종교과가 작성한 것이다. 일본 NHK 방송은 최근 <야스쿠니 신사-점령하에서 알려지지 않은
공방>이라는 전후 60주년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이 문서를 공개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치열한 외교전 전말을 밝혀냈다. 이에 따르면, 당초
미국은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다.
“초국가주의적·군국주의적 조직과 운동이 종교의 가면에 은폐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연합군 군정을 시작하면서 당시 사령관인
맥아더가 한 첫 발언이다.
미국 국무부 고위 관리도 당시 라디오에 출연해 “일본에 두 번 다시 세계 평화를 위협하게 해서는 안 된다.
신도(神道)가 개인의 종교라면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 신도는 폐지해야만 한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초국가주의는 전면 통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특히 야스쿠니 신사 폐지에 강경했던 쪽은 미군정 연합군사령부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야스쿠니 신사 소각을 주장했다. 일본 육·해군이 완전히 해체되기 한 달 전인 1945년 10월 말, 일본 육군성은 전몰자 신원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 초혼제를 준비했다. 일본 천황의 결정으로 11월20일, 참배자 3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 초혼제가 치러졌다. 쇼와
천황이 참배한 이 행사에는 2백만명이 넘는 전몰자에 대한 초혼이 이루어졌다.
야스쿠니 신사는
존폐 위기에서 존속을 위한 지혜를 짜냈다. 국가의 신사가 아닌 독립적인 신사로 존속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신사측은 미군정 민간 정보 교육국
종교과의 윌리엄 번스와 면담했다. 종교과는 교육이나 종교 등 일본인의 정신 개혁을 담당했고, 국가 신도 폐지를 지휘하고 있었다. 번스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군국주의 제거라는 점령 목적을 완수해야 했다.
전쟁
시기 신사는 국가가 관리했지만 1945년 12월15일 연합군사령부는 맥아더 지령 448호를 통해 국가 신도를 폐지하고 군국주의·초국가주의
선전·보급을 금지했다. 정·교 분리 원칙을 내세워 국가와 종교의 연결 고리를 단절했다.
도죠 히데키 전 총리는
‘국체’로 부르는 천황 중심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황실을 지켜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에게 황실 수호는 바로 국체 수호였다. 일본 정신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는 영원히 존속해야 하고, 천황의 신사 참배는 당연한 것이었다.
1946년 천황의 ‘인간 선언’으로 천황의 신격성은 부정되고 민주화·비군사화가 진전되었다. 천황은 스스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지했다. 임시 초혼제를 지낸 전몰자를 합사하려던 야스쿠니 신사는 곤궁에 빠졌다. 천황이 참배하지 않는 합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연합군사령부는 전몰자 합사를 금했다. 군국주의적 요소를 철거할 것도 명령했다. 야스쿠니 신사가 가지고 있던 군국주의 신사라는 내용을
근본적으로 탈색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유족회 압력과 미국 이해 맞물려
‘기사회생’
야스쿠니 신사는 군국주의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연합군사령부와의 교섭을 진행하면서 독자 생존을 고민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새로운 축제를 고안했다. 1947년 시작된 혼령 축제는 평화적인 위령
축제라는 성격을 내세웠다.
야스쿠니 신사를 폐지하려는 연합군사령부의 움직임에 강력하게 대응한
쪽은 일본 전몰자의 유족들이었다. 유족들은 단체를 조직해 연합군사령부와 교섭했다. 야스쿠니 존속을 간절히 희망하는 청원서도 보냈다. 한편
공개적인 합사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인 합사를 내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서 냉전이 심해지자 연합군사령부의 정책이 바뀌었다. 일본을 반공
방파제로 만들기 위해 미국은 일본에 대한 비군사화 노선을 전환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정책도 변했다. 연합군사령부의 내부 기밀 문서도
‘야스쿠니 신사 존속을 인정해야 한다. 폐지는 오히려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폐지 불가’의 표면적인 근거는 유족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연합군사령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사령부 종교과는 1949년 보고서에 ‘종전 직후 늦어도 1946년까지 신사를
폐지했어야만 했다’고 적었다. 결국 야스쿠니 신사는 국제 정세 변화와 유족회의 압력을 통해 기사회생한 셈이다. 1952년 연합군사령부에 의한
미군정 종식과 함께 천황의 야스쿠니 참배도 부활했다. 전사한 일본군 2백46만 명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다시금 일본 우익들에게 정신적
단결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그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