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동지’ 윤석열, ‘어제의 적’ 이재명…그 가운데 선 한동훈
공간 안 내주는 尹, 손 내미는 李…韓, 채 해병 특검으로 결단 내릴까
#1.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 여당 지도부는 8월30일 만찬을 가질 계획으로 알려졌으나 연기됐다. 추석 연휴 이후에 다시 일정을 잡는다는 계획이지만, 구체적인 시점은 아직 협의되지 못했다는 전언이다. 일정 연기는 대통령실이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석 민생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유에서다. 정치권에선 최근 의대 증원 문제를 둘러싼 당정 갈등 기류가 영향을 미쳤을 거란 분석이 나온다.
#2.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한동훈 대표가 9월1일 마주했다. 11년 만에 공식적으로 열린 여야 대표회담에서다. 회담은 이 대표가 8월18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며 당대표 연임에 성공한 직후 전격적으로 내놓은 제안에 한 대표가 화답하면서 이뤄졌다. 당초 8월25일로 예정된 일정이었으나 이 대표가 코로나19에 확진되면서 한 차례 미뤄졌다. 의제 등 협상 과정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무산될 가능성도 거론됐으나 곧 일정을 다시 확정해 원래 일정보다 딱 일주일이 지난 후 회담이 열렸다.
만나지 못한 윤 대통령과 한 대표, 만나서 대화한 이 대표와 한 대표. 어찌 보면 다소 낯선 장면들이다. 소문난 동지였던 윤 대통령과 한 대표 사이는 이제 서로 만남이 불편할 정도로 멀어졌다. 반면 총선 과정에서 심판의 대상이자 서로 제1의 적이었던 이 대표와 한 대표의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이 지점에서 한 대표는 크게 고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계 설정은 한 대표의 최대 과제다. 자칫하면 홀로 고립된다. 한 대표는 누구를 등지고 누구를 마주할까.
尹은 밀고, 李는 당기고…흔들리는 韓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농단 사건을 비롯해 검찰 시절 숱한 사건을 함께 수사했다. 검찰 내 이른바 ‘윤석열 사단’ 중에서도 한 대표는 최측근으로 꼽혔다. 윤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첫 법무부 장관으로 40대였던 한동훈 당시 검사장을 파격 발탁했다. 그러나 한 대표가 지난해 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이후 두 사람 사이엔 급격히 거리감이 생겨났다. 명품백 수수 의혹 등 김건희 여사 논란 대응에 대한 입장차로 균열이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윤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은 한 대표에게 가장 중대한 정치적 숙제로 떠올랐다. 윤 대통령과 같은 곳을 바라볼 것인가, 다른 곳을 바라볼 것인가. 지난 4월 여당의 총선 참패엔 정권 심판적 성격이 분명 존재했다. 패배의 책임을 역시 피할 수 없는 한 대표에겐 정치적 돌파구가 절실했다. 한 대표는 지난 6월 당권 도전에 나서면서 채 해병 사망 사고 관련 특검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사실상 ‘비윤(非윤석열) 선언’이었다. 전당대회 과정에서 윤심(尹心·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은 한 대표를 적극 견제했다. 그럼에도 한 대표는 62.8%의 압도적 득표로 당대표에 선출됐다.
당심과 민심 모두가 한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여권 권력은 비교적 조기에 양분된 셈이 됐다. 그러나 한 대표 입장에선 난관이 계속 나타난다. 취임 이후에도 윤 대통령과의 관계는 한 대표에게 난제다. 채 해병 특검과 의·정 갈등 문제가 대표적이다. 특히 한 대표는 최근 의·정 갈등과 관련해 2026년 유예안을 제시했지만, 대통령과 정부는 분명히 거부했다. 그렇게 한 대표는 주춤했다. 상대는 임기를 반 이상 남겨 놓은 ‘살아있는 권력’이다. 여전히 당내에서도 윤 대통령의 영향력은 발휘된다. 한 대표를 향한 당 내부의 견제도 지속되고 있다. 사실상 한 대표는 여전히 여권 내 비주류로 평가된다.
그런 가운데 이재명 대표는 한 대표에게 손을 내민다. 민생 문제에서 협력하자는 것이다. 물론 정략적 의도도 엿보인다. 이 대표 입장에선 자신의 정치력을 부각하고, 윤 대통령과 한 대표 사이를 벌려 놓을 수 있다. 그걸 한 대표도 모르지 않지만, 외면하긴 쉽지 않다. 당내에서 아직 한 대표의 공간은 많지 않다. 윤 대통령이 그 공간을 내주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표와의 회담은 한 대표 입장에선 숨통이 트인 계기다. 스포트라이트를 가져오고, 정치력을 부각했다. 중대한 쟁점들에 대해선 대부분 합의가 이뤄지지 못해 ‘빈손 회담’이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회담 이후 양측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특히 여야의 공통 공약 추진 협의기구를 만들기로 한 부분에 대해서 양측 다 매우 고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론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채 해병 특검이 尹-韓 관계의 ‘킬러문항’
특히 의·정 갈등 문제와 관련한 한 대표와 이 대표의 미묘한 협력이 주목된다. 최근 이 대표는 이 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 시점이 한 대표가 2026년 의대 증원 유예안을 제시한 뒤 정부와의 갈등이 부각될 때여서 이 대표가 한 대표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민주당이 대표회담에 의·정 갈등 문제를 올리려 하자 국민의힘은 반대했다. 그러나 회담 현장에서 해당 문제는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공동 발표문에도 ‘현재 의료 사태와 관련해 추석 연휴 응급의료에 만전을 기할 것을 정부에 당부하고 국회 차원 대책을 협의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이 대표와의 협력에 대해 한 대표가 신중하거나 또는 주저하는 듯한 모습도 계속 엿보인다. 이재명 대표는 의료 사태 관련 여야 대책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 대표와 공감대를 이뤘다”고 전했지만, 공식 발표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한 대표는 대책기구를 만들자는 민주당 제안에 화답해 달라”고 촉구했다. 한 대표가 용산(대통령실)을 완전히 등지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과연 한 대표는 누구를 등지고 누구를 마주할까. 바로미터로는 채 해병 특검이 꼽힌다. 채 해병 특검 문제는 한 대표가 풀어야 할 ‘킬러문항’으로 평가된다. 민주당은 한 대표가 전당대회 과정에서 주장했던 제3자 추천 특검을 받겠다면서 한 대표의 선택을 압박하고 있다. 용산은 물론 당 내부적으로도 반대 의견이 거센 상황이다. 채 해병 특검을 추진할 경우 윤 대통령과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가능성이 높다. 결정을 더 미루기도 어렵다. 정치권에선 채 해병 특검과 관련한 한 대표의 선택에 따라 정치권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