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의대 증원’ 정면 충돌한 윤석열과 한동훈…총선 때도 한덕수 가운데 두고 맞붙었다
4월1일 尹 담화 전날 두 차례 심야 간접 통화…韓 “2000명 고집하면 비대위원장 관두겠다” 이재명 대표, 한동훈의 ‘내년 증원 유예안’ 지지…대통령 국정 주도권 잃고 고립될 수 있어
“무리한 상황을 감안하여 (의대) 증원을 1년간 유예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더 좋은 대안이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8월27일, 한동훈 페이스북)
묘한 기시감이 있다. 시간을 거슬러 4·10 총선을 열흘여 앞둔 4월1일,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부산 지원유세 현장에서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숫자에 매몰될 문제는 아닙니다. 국민이 원하는 그 방향대로 정부가 나서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힘주어 호소했다. 의·정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 자칫 총선 결과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당 안팎의 우려가 큰 상황이었다. 의대 증원 숫자 조정 가능성을 시사하는 한 대표의 발언에 당황한 대통령실은 즉각 2000명 증원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하며 진화에 나섰다.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하면, 의대 정원 증원 문제를 놓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가 대립각을 세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총선 기간 둘 사이에 수차례 심각한 갈등이 있었는데, 세간에 내막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갈등’이 바로 의·정 갈등 해법에 대한 이견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 대표는 비대위원장직 사퇴까지 언급하며 ‘2000명 증원’을 고수하는 대통령과 대통령실을 설득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복수의 여권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한덕수 국무총리가 중간에서 의견을 전달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4월1일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의대 증원’ 입장을 밝힌다는 소식을 들은 한 대표는 전날 자정 가까운 시각에 한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2000명 증원’ 입장을 끝까지 유지할 경우 선거가 상당히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의견을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총리는 바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취지의 답변이 돌아왔다.
이에 한 총리가 한 대표에게 전화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전하자, 한 대표는 ‘2000명 증원’을 고수한다면 비대위원장직을 사퇴하고 다음 날 계획돼 있던 부산 유세에 가지 않을 수 있다는 초강수를 둔 것으로 전해진다. 위기감을 느낀 한 총리는 또 한 번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한 대표의 의견은 끝내 수용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다음 날 오전 ‘2000명 증원’ 입장을 분명히 하는 담화를 발표했고, 불과 두어 시간 후 한 대표는 ‘숫자에 매몰돼선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로 이견을 표출했다.
尹 ‘의료 개혁’ vs 韓 ‘국민 생명’…명분 대 명분의 충돌
‘불신’ ‘파국’ ‘변곡점’…. 의·정 갈등 문제를 두고 다시 촉발된 윤 대통령과 한 대표 간 갈등 사태를 두고 기존의 수차례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충돌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앞선 갈등은 물밑에서 그쳤거나 드러나더라도 봉합 가능한 수준이었다면 이번엔 서로 한 발짝도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정면충돌이고, 정면승부다. 역대 어느 정부도 성공하지 못한 의료 개혁을 해내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윤 대통령과 의료 대란에 따른 위기를 우려하며 증원 유예안을 주장하는 한 대표. 민심이 어디로 기울지는 추석 연휴를 지나며 판가름 날 전망이다.
정국 주도권을 둘러싼 여권 내 두 개의 태양 간 신경전은 일촉즉발 상황 속에 더욱 가팔라지는 양상이다. 한 대표가 8월25일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를 통해 ‘2026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 유예’를 대통령실에 제안했지만 거절당한 사실이 최근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대통령실은 즉각 ‘수용 불가’ 입장을 공개 표명했다. 그럼에도 한 대표는 8월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1년간 유예하자’는 글을 올려 당초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이후 윤 대통령은 8월30일 열릴 예정이던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만찬을 추석 이후로 연기하며 갈등 재점화설에 불을 댕겼다. 만찬 취소 사실을 한 대표가 뒤늦게 안 것이 밝혀지며 패싱 논란까지 일었다.
한 대표가 정면돌파를 선택한 데는 전체 국민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니만큼 대통령과의 갈등을 불사하더라도 밀어붙일 명분과 그에 따른 정치적 실익을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셈법이 복잡한 채 해병 특검법 등 정치적 사안보다 민생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전략으로 방향을 튼 한 대표가 경고등에 불이 켜진 의료 대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여당 대표로서의 역할에 물음표를 떠안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의료 대란이 심각해져 여론이 한 대표 쪽으로 기운다면 대통령과의 차별화에 성공해 독자 노선을 갈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한 대표 측은 시간이 흐를수록 한 대표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믿는 분위기다. 친한계 핵심 관계자는 “국민 여론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수술 지연으로 사망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죽어간다고 아우성치는 국민을 여당 대표가 외면해서 되겠나”라고 말했다. 또 다른 친한계 인사는 “(의료 대란으로) 피해 사례가 속출하면 민심이 들끓을 것”이라면서 “시간과 민심은 우리 편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어 “의원들도 63% 지지(전당대회 득표율)를 얻은 미래권력의 눈치를 보지 지지율 30%도 안 되는 대통령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한 대표에게 힘을 실어줄 당내 세력이 부족한 것은 약점이다. 이미 친윤계를 중심으로 묘한 긴장감이 포착되고 있다. 당장 추경호 원내대표부터 ‘용산’ 편에 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추 원내대표는 8월28일 의원총회 직후 “정부의 (의대 입학정원 증원) 추진 방침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당도 함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한 대표가 대통령실과의 충분한 사전 교감 없이 중재안을 전달한 과정이 다소 서툴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한 대표 측이 공식 협의되지도 않은 8월30일 만찬을 언론에 흘렸다고 의심하면서 “이런 식이면 내밀한 대화는 어렵다. 한 대표의 습관 같다”며 당정 신뢰관계가 깨진 책임을 한 대표에게 돌리기도 했다.
한동훈에 힘 싣는 이재명…“추석 넘겨도 상황은 계속 닥친다”
“의료체계가 무너지면 정권 유지가 힘들다고 본다”(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가을이면 지방 의료원부터 연쇄 도산할 것이다. 정부가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최근 정치권 곳곳에서 의료 대란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위기의식이 팽배해지면서 당내에선 의·정 갈등 책임자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공개적으로 나왔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8월28일 “이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책임자들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장차관 교체로) 새로운 협상자가 온다면 변화를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대통령의 결정을 실행하는 장차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대통령의 인사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묻는 것이어서 또 다른 뇌관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윤 대통령은 8월29일 국정브리핑에서도 “이제 의대 충원이 마무리된 만큼 개혁의 본질인 ‘지역, 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기존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연휴에 절대 병원 갈 일 생겨선 안 된다’는 걱정이 추석 민심으로 자리 잡을 경우 올 들어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윤 대통령의 지지율을 더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파국으로 치닫던 의·정 갈등이 당정 갈등으로 옮겨 붙으며 국정 혼선에 따른 국민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닥친 의료 대란에도 협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대통령이 국정 주도권을 잃고 고립될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최근 여야는 ‘PA(진료지원) 간호사’ 도입을 골자로 한 간호법 제정안 등 민생법안을 22대 국회 처음으로 합의 처리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야 대표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현안 해결을 위한 협치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국민 눈에 ‘변화의 서막’이 열린 것으로 비춰진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8월28일 한 대표의 의대 증원 유예안에 대해 “의료 붕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불가피한 대안”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목을 끌었다. 첨예하게 갈린 대통령실과 한 대표 사이에서 한 대표에게 일부 힘을 실어줬다는 해석이다.
윤태곤 더모아 정책분석실장은 지난 27일 SBS 라디오에서 “한 대표의 제안에도 대통령이 뚝심을 지켰다고 하면 용산에 좋을 일인가”라고 반문하며 “추석을 어떻게 넘길지 잘 모르겠지만 큰 탈 없이 넘어간다 하더라도 상황은 계속 닥친다. 한 학기 수업을 안 받아도 유급시키지 않는다며 억지로 미뤄놨지만 2학기 때도 전공의나 학생들이 복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