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 마법처럼 펼쳐진 스크린…‘부안 무빙’에서 본 영화라는 삶
[르포] 글로컬 시대의 새로운 모델이 될 팝업 영화제, ‘부안 무빙’ 대한민국 전역 찾아 움직인다…장소와 어울리는 영화와 매칭
어린 토토와 영사기사 알프레도가 극장에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광장의 한 건물 외벽에 영사기를 쏜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의 삶이 공유되는 ‘광장’이 순식간에 극장으로 변한다. 이것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1988》의 한 장면. 현실 속 공간이 꿈의 무대가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그런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만날 수 있었던 ‘제2회 팝업 시네마: 부안 무빙(Pop-Up Cinema: Buan Moving)’이 8월15일부터 17일까지 전북 부안군 변산해수욕장 일대에서 펼쳐졌다. 지평선 위로 뜬 노을이 해변에 세워진 야외 스크린을 붉게 물들일 때마다, 스크린 너머로 무지개가 뜰 때마다, 해변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에도 알록달록한 감정의 너울이 일었다.
지역 특성 부각시키는 영화 소환
‘팝업 시네마: 부안 무빙’은 ‘팝업스토어’라는 형태로 지난해 부안에서 첫발을 내디뎠다. ‘팝업’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는 단순한 영화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전역의 아름다운 스폿을 찾아 움직이며(moving), 그 지역에 어울리는 테마의 영화(movie)를 선보이는 일종의 문화축제다. 지난해와 올해는 ‘부안 무빙’이지만, 다음번엔 ‘제주 무빙’ 혹은 ‘서울 무빙’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기획엔 런던에서 영화와 영화 주제에 맞는 장소 페어링을 시도해 성공으로 이끈 전혜정 예술총감독의 경험과 노하우가 녹아있다. 런던아시아영화제 위원장이기도 한 전혜정 총감독은 한국 영화가 100주년을 맞았던 2019년, 한국 영화를 알리기 위해 런던의 랜드마크와 한국 영화를 연결한 바 있다.
당시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조선 후기 화가 장승업을 모델로 한 《취화선》이 상영됐고, 국립초상화갤러리에선 (장소에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 《관상》이, 템스강에선 봉준호 감독의 (한강의) 《괴물》이 상영돼 영국 현지에서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팝업 시네마: 부안 무빙’은 장소와 그 장소에 어울리는 영화를 매칭해 시너지를 일으켰던 런던에서의 경험을 국내로 확장시킨 사례라고도 평할 수 있다. 이 축제를 영화제 관점이 아니라, 문화 전반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 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영화를 소환해 지역과 관객의 소통을 도모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글로컬(global+local) 시대’의 좋은 모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역력하다.
‘사랑’이라는 테마로 열린 올해의 ‘팝업 시네마: 부안 무빙’에선 변산해수욕장이라는 공간과 어우러지는 《가려진 시간》(2016), 《그해 여름》(2006), 《파이란》(2001) 등 한국 멜로 영화가 관객들을 만났다. 개막작 《가려진 시간》을 들고 부안을 찾은 엄태화 감독은 인사말을 통해 ‘팝업 시네마: 부안 무빙’의 본질을 선명하게 요약했다. “《가려진 시간》은 커다란 파도 앞에 선 두 사람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영화입니다. 중요한 배경으로 바다가 등장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영화를 보게 돼서 더욱 뜻깊습니다.”
테마는 ‘사랑’…韓 멜로작들이 비추는 주제
영화제 둘째 날에는 조근식 감독의 《그해 여름》이 그야말로 여름 속에서 상영됐다. 관객은 18년 전 이병헌과 수애를 보며 미소 지었고, 영화 속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연에 눈시울을 붉혔다.
조근식 감독은 당시의 이병헌을 떠올리며 “개구쟁이 같은 면은 물론, 소년의 느낌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이 굉장히 예뻤다. 이 배우가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에서 보여준 강한 캐릭터뿐 아니라, 사랑에 빠진 소년의 느낌도 잘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영화제 마지막 날인 8월17일은 그야말로 ‘박정민 데이’였다. 박정민은 이날 ‘명장면으로 보는 한국 영화 걸작선’ 필름 토크와 자신의 단편영화 연출작인 《반장선거》(2021)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부안으로 달려왔다. 그를 보기 위해 전국 각자에서 모인 팬들로 인해 축제 열기가 끓어오르기도 했다.
변산해수욕장 워케이션센터에서 열린 ‘명장면으로 보는 한국 영화 걸작선’ 필름 토크는 한국 영화가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시점에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과거의 한국 영화를 돌아보기 위해 마련된 기획이다.
패널로 참석한 김홍준 영상자료원 원장은 “한국 고전 영화는 낡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젊은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신상옥 감독의 1961년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6분), ‘김기영 전작전’ 오마주 영상(10분15초), ‘안성기전’ 오마주 영상(12분11초) 등 세 편의 영상이 상영됐다.
영상이 상영된 후엔 한국 고전 영화의 재미와 매력과 한국적 미장센, 과거 배우들의 연기법, 한국 영화사에서 김기영이라는 감독이 지니는 의미 등 다양한 주제를 두고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갔다. 특히 ‘김기영 전작전’에서 배우 윤여정이 주연을 맡은 《화녀》(1971)와 《충녀》(1972)가 등장했을 때, 객석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김 원장은 “김기영 감독님의 업적 중 하나가 훌륭한 배우들을 많이 발굴하셨다는 것”이라며 “텔레비전에서 활동하던 어린 윤여정 배우를 스크린에 데뷔시킨 것도 김기영 감독”이라고 말했다. 《그것만은 내 세상》(2018)에서 윤여정과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박정민은 “윤여정 선생님이 《충녀》 포스터를 보여주시며 김기영 감독님과 작업하던 시절을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다”는 에피소드를 풀어놓기도 했다.
필름토크 후 야외 스크린으로 자리를 옮긴 박정민은 《반장선거》를 관람한 관객과의 대화에 나섰다. 《반장선거》는 어른의 세계만큼 치열한 5학년 2반 교실의 반장선거 풍경을 담은 ‘초딩 누아르’다.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영화이니만큼 음악부터 편집까지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27명의 아역배우 캐스팅에 관한 후일담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박정민은 27명의 배우 캐스팅을 영상으로 미리 마치고, 미팅을 가졌단다. 그러니까, 미팅 후 탈락의 고배를 본 아이는 없었던 셈. 그렇게 진행한 이유에 대해 박정민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디션 탈락의 고배를 굳이 어렸을 때부터 맛보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그의 자세가 극 전반에 묻어나서였을까. 질문을 위해 마이크를 건네받은 관객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이들을 상담하고 있는 사람인데요. 27명의 아이를 일일이 지도하는 게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 잘 해내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 작품은 최민식·장백지 주연의 영화 《파이란》이다. 이날 송해성 감독은 멜로라는 장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멜로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음악을 의미하는 ‘멜로스(melos)’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장르를 나누다 보니까 멜로 드라마로 한정돼 바라보는데. 멜로라는 건 결국 삶을 노래하고 인생을 노래하는 것이죠.” 2회에 들어선 팝업 시네마, 부안 무빙이 상영한 것은 비단 멜로 영화만이 아니었다. ‘영화라는 삶’을 비춘 이 영화제는 다음 스폿에서도 아름다운 테마를 통해 인생을 노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