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일성 “인민 위해 아편 재배-핵실험 하라”...유령병·마약중독에 떠나간 北 주민들
[인터뷰] 탈북민 3인이 말하는 북핵 개발 뒷이야기
“과거 우리는 중국 당나라·명나라·청나라 시절뿐 아니라 일본에도 얽매여 살았다. 자주권은 없었다. 국력을 강화하려면 핵을 가져야 한다. 현대적 군사 무력인 미사일을 가져야 한다. 인민 생활을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이를 위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편을 재배하라. 내가 팔아주겠다.”
북한 최고권력자 김일성(1994년 사망)이 생전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탈북민의 증언이 나왔다. 북핵 개발의 시작점이 1970년대 이런 유훈 교시(생전에 남긴 방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북한이 국력 강화를 위해 핵·미사일 개발에 나섰고, 자체 생산한 마약을 국제사회에 판 대금으로 이런 비용을 충당했다는 취지다. 최근 국제사회가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 주민들이 원인 모를 질병을 앓는다는 ‘유령병’ 문제를 재조명한 상황에서 나온 이야기다.
2010년대 탈북한 80대 남성 심상수씨(가명)는 “‘내가 팔아주겠다’는 말을 들은 양강도 주민들이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시사저널은 8월8일 오전 서울시 노원구 인근에서 심씨를 비롯한 최민경 북한감금피해자 가족회 대표, 60대 남성 김봉식씨(가명) 등 탈북민 3명을 만났다. 본지는 이들의 증언을 최대한 그대로 담았다. 다만 가족이 북한에 남아있는 등 신변 노출 위험을 우려한 경우엔 직업과 같은 구체적 정보는 기재하지 않았다.
일명 ‘백도라지 사업’, 핵 개발의 시작은 아편
“1994년의 일이다. ‘백도라지 사업’에 동원됐다. 주민들은 순진하게도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북한 내 상품인 백도라지를 파는 식의 일을 뜻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해 함경북도에 있는 길주군으로 향했다. 처음엔 길주역에서 내렸다. 길주에서 유명한 평륙비행장을 거쳐 120리(里, 1리=약 0.4km) 정도 들어갔다. 거기엔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완전히 모범적이다’라고 할 정도로 잘 정돈된 농장이 있다. 우리는 밤에 움직였다. 입구 초소까지 60리인데, 여기서 검색을 받았다. 이후 두 번째 초소, 세 번째 마지막 초소까지 들어갔다. 이튿날 밝을 때 보니 온통 군부대였다. 여의도 면적 정도 돼 보였다.”
최민경 대표의 이야기다. 최 대표는 1997년 12월 처음 탈북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네 번 북송을 당했다. 다섯 번의 시도 끝에 탈북에 성공, 2012년 국내에 입국했다. 이런 최 대표가 거론한 백도라지는 북한에서 ‘아편’을 뜻한다. 길주군 인근의 군사비밀기지에서 외화벌이 수단인 양귀비(아편의 원료)를 재배했다고 한다. 최 대표는 1994년 5~11월 군 부대원들의 식모로 근무했을 뿐 아니라 아편 채취에도 참여했다. 지금은 사라진 북한의 6군단이 이곳을 담당했다. 6군단은 함경북도 청진에 사령부를 뒀었다.
최 대표는 “꽃이 피는 6월부터 9월까지 액을 채취하는 성수기”라며 “북한에선 액을 채취하는 기계가 없으니 사람들이 동원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명 ‘마약 농장’에서 풍계리 핵실험장까지 거리는 약 80리. 핵실험장 인근엔 철조망이 쳐졌는데, 핵실험·연구를 맡은 기술자 가족들이 이곳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했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2006년부터 6번의 핵실험이 진행된 곳으로 알려졌다.
“아편 팔아주겠다” 공해상에서 밀매된 마약
북한이 마약에 손을 뻗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으로는 김일성 주석의 교시가 지목됐다. 김일성은 중국 당·명·청나라 시절부터 일제강점기 등 한반도가 외세에 휘둘렸다는 사실을 생전에 지적했다고 한다. 핵·미사일 개발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면서다. 심씨는 “이에 따라 1970년대부터 핵·미사일 개발 준비에 들어갔고 김정일 시절 이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다.
“핵실험을 길주군 풍계리에서 했다. 이곳에서 아편이 심한(횡행한) 이유는 핵실험 등에 필요한 자금을 위해서였다. 다른 하나는, 주민들의 항의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핵실험장에서 몇백 리가 떨어진 곳에서도 병자가 되는 등 (부작용을) 과학자들이 역사적 자료를 통해 알지 않나. 더구나 양강도는 가장 못사는 도였다. 이런 이유로 ‘(김일성이) 아편을 심어라, 그래서 인민 생활을 향상시켜라. 내가 팔아주겠다’고 했던 거다. 그러자 양강도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
실제로 아편은 북한 체제를 유지하는 자금줄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심씨가 확인한 바로는, 마약밀매는 주로 공해(公海)상에서 이뤄졌다. “언젠가 해군여단이 있는 함경남도 신포에 나간 적이 있다”고 설명한 심씨는 “큰 배를 구경하는데 한 당원이 ‘외화를 벌어 바치는 용도의 배’라고 하더라. 당시 외화벌이는 ‘임자가 없는 바다’, 즉 공해에 나가 다른 밀수꾼에게 마약 등을 파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심씨는 배 밑창이 2층으로 구분돼 있는데, 그 밑에 한 층이 또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곳에 아편이나 무기 등을 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심씨가 이를 목격한 시기는 1980~90년대다.
통일부 자료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있다.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북한은 1970년대 중반부터 정권 차원에서 마약을 생산해 밀수출했다. 외화벌이가 목적이다. 마약밀매를 적극 추진한 시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심각해진 경제난이 이유였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무역을 통한 외화벌이가 감소한 영향도 컸다. 이와 관련해 1989년 7월 김정일의 지시로 양귀비 재배면적 확장사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황해북도 개성과 평안북도 영변 등까지 확대됐을 정도다. 자료에는 또한 “1993년 8월 함경북도 청진 소재 나남 제약 공장을 아편 정제 공장으로 가동하고 있고, 1995년엔 40톤 이상의 마약류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진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일성의 아편’은 역설적이게도 내부 분열을 가파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1994년 7월8일, 김일성의 사망일이 기폭제였다. ‘반란’은 곧바로 벌어졌다. 6군단이 아편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면서다. 최 대표는 “김일성이 죽었는데도 6군단은 ‘아편이 돈이 된다’며 서로 가지겠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알았다고 했다. 6군단은 이후 김정일에 대한 쿠데타를 모의하다 축출된 것으로 전해졌다.
시리아 미사일과 러시아 과학자들이 도움
이런 상황에서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은 속도를 냈다. 2006년 1차 핵실험을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핵시설 동결이라는 조건하에 북한에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는 것 등을 핵심으로 한 제네바 합의, 그리고 이런 합의 무산 등을 겪은 이후다. 2000년대부턴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 시인, 영변 핵시설 동결 해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추방, NPT 탈퇴 선언 등 북한의 강공이 이어졌다. 심씨는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던 무렵, 북한이 암암리에 돈을 주고 러시아 핵 기술자들을 데려왔다”며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핵 개발을 빨리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미사일과 관련해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한이 2차 중동전쟁(1956년) 당시 시리아에 공군 비행기를 지원했다. F-15나 F-17보단 조금 낙후한 모델이다. 이를 계기로 시리아가 서남부에 있는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서 되찾았다. 그러자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순항미사일을 김일성에게 선물로 건넸다. 위성에도 잡히지 않았다. 러시아가 김일성이 요구한 미사일 설계도를 거절한 상황에서다. 북한 과학자들은 이를 해부해 순항미사일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교시가 인민들의 삶을 향상시키지는 못한 듯하다. 핵실험장 인근 주민 다수가 방사능 피폭과 마약중독 등의 상황에 놓였다는 증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씨는 1차 핵실험 직후인 2008년부터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 지하 갱도를 파는 일을 했다. 이 과정에서 다량의 먼지 등을 흡입했고, 현재 폐질환 등을 앓고 있다. 20여 년간 길주군에 사는 친척집을 오간 심씨의 다리에는 피부 질환인 듯한 검푸른 자국이 보인다. 최 대표 역시 “피부가 가렵고 물집이 생기면서 피부색이 변하는 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딸 아이도 태어나선 가려움증을 호소한다”고도 했다.
풍계리 인근 출신 탈북민 80명 가운데 17명이 방사선에 피폭됐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한국원자력의학원은 통일부의 의뢰를 받아 2023년 5~11월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 지역 8개 시군에 거주한 이력이 있는 탈북민 80명을 대상으로 방사선 피폭과 방사능 오염 검사를 실시했다. 지난 2월 공개된 결과를 보면, 17명에게서 누적 피폭선량을 측정하는 ‘안정형 염색체 이상 검사’에서 최소검출한계(0.25 Gy) 이상의 결과가 나오는 등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최근 중국의 탈북민 강제 북송이 이뤄졌지만 탈북 행렬은 잇따르고 있다. 지난 7월 프랑스 주재 북한 외교관 일가족의 망명 요청 소식이 알려졌다. 8월8일에는 북한 주민 1명이 인천 강화군을 거쳐 귀순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미사일 발사뿐 아니라 오물풍선 살포 등 복합적인 도발을 하고 있다. MDL 인근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 매설 등의 작업에 속도를 낸다는 사실도 전해졌다. 최 대표는 “북한 전체가 철창 없는 감옥임을 알 수 있다”며 “더 많은 피해자들을 찾아내 연구를 심도 있게 해서 치료와 의료 서비스를 지원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